비평

무엇이 되지 않는 사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이 되지 않는 사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홍진훤의 풍경사진을 경유하여

홍진훤의 풍경사진을 경유하여

사진은 쉽게 무엇이 된다. 무엇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는 이미지도 이미 무엇이 되어 있다. 대상을 찍은 사진은 그 대상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진 듯 보이고(대체로 그러하며), 그렇기에 지시와 얽힌다. 사진 속에 사람이 있다면 얼굴의 표정을 읽으려 하고, 무너진 건물을 보면 그것이 무너진 경위와 비극을 떠올린다. 이러한 특성을 가장 노골적으로 활용하는 영역이 보도사진이다. 보도사진은 사건의 현장과 인물을 한 장면 안에 가두어 사건의 증거이자 현실의 일부로 제시한다. 이러한 이미지에는 한 장의 사진 안에 사건의 비극과 인물의 표정, 결정적 순간이 절묘하게 들어있기에 감상자는 세계의 놀라운 일을 알게 되었다는 충격을 받기 쉽다. 포토 저널리즘 분야에서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들을 감상하다 보면 우리가 그러한 사진에 얼마나 몰두하게 되는지 그리고 몰두가 얼마나 간편하게 믿음을 불러오는지 알 수 있다. 사진은 그렇게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것이 무엇인지와 그것을 둘러싼 정서 및 정보까지 결정하며 현실과 연루되어 왔다.

The Terror of War, 1972

The Terror of War, 1972

한편 풍경 사진이라면 조금 다른 위치에 있는 듯도 하다. 풍경은 일이 일어나는 현장과 다르고, 사건이나 사물,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과도 다르다. 풍경을 나타내다가도 자연스럽게 장소를 지시하게 된다. 풍경사진을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 맺히는 이미지가 저마다 다른 것도 이러한 풍경의 불특정성 때문일 것이다. 풍경 안에는 분명한 대상들이 있지만 그중 무엇도 자신을 보라고 외치지 않는다. 풍경은 스스로 대상이 되거나 사건의 잔여가 된다. (사건 당시를 실감나게 찍은 사진은 찍히는 순간 그 사건을 재현하는 스펙터클로 남기 마련이다.) 풍경은 다가가서 보는 것보다는 희미하게 바라보는 것이 어울린다. 그래서 풍경사진을 볼 때는 찍힌 풍경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 사이의 거리감이 쉽게 생긴다. 우리는 그 거리를 유지한 채 풍경을 바라보거나, 때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이미지를 넘겨버린다.

풍경사진을 바라보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그 독법은 크게 두 측면으로 나눠볼 수 있었다. 한쪽에서는 풍경 사진을 신비주의를 통해 이해하며 작가의 내면이나 현실 너머를 드러내는 매개로 본다. 풍경 사진이 만드는 흐릿한 시야, 분산된 원근과 여백은 보이는 세계로부터 벗어나 다른 차원의 감각을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¹ 다른 한쪽에서는 풍경사진이 변화하는 풍경 속 시공간의 단절을 기록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한다고 본다. 장소가 끊임없이 변화할 때 풍경을 촬영한 사진은 그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낸다는 것이다.² 그렇게 한 축은 풍경을 보이는 것 너머의 은유로 만들고 다른 한 축은 풍경을 보이는 것 안의 현실로 만든다. 하지만 두 관점 모두 사진 속 풍경을 해석 가능한 의미로 수렴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풍경사진에서 시작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전시 중 홍진훤의 사진 작업인 <사실 은하수는 유령입니다>를 보고 나서였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앞뒤로 설치된 세 개의 영상작업이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풍경 사진 다섯 점이, 왼편에는 안톤 판네쿡의 연구 이미지들 위에 작가가 촬영해 온 풍경 사진들과 소수의 정물에 가까운 사진들이 놓여 있다. 이들은 한눈에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알기 어려운 이미지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이미지는 아니다. 사진들을 배치한 지형도 및 각 사진들이 찍힌 장소와 년도에 대한 캡션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텍스트는 볼 만한 ‘무엇’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한편 풍경 사진이라면 조금 다른 위치에 있는 듯도 하다. 풍경은 일이 일어나는 현장과 다르고, 사건이나 사물,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과도 다르다. 풍경을 나타내다가도 자연스럽게 장소를 지시하게 된다. 풍경사진을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 맺히는 이미지가 저마다 다른 것도 이러한 풍경의 불특정성 때문일 것이다. 풍경 안에는 분명한 대상들이 있지만 그중 무엇도 자신을 보라고 외치지 않는다. 풍경은 스스로 대상이 되거나 사건의 잔여가 된다. (사건 당시를 실감나게 찍은 사진은 찍히는 순간 그 사건을 재현하는 스펙터클로 남기 마련이다.) 풍경은 다가가서 보는 것보다는 희미하게 바라보는 것이 어울린다. 그래서 풍경사진을 볼 때는 찍힌 풍경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 사이의 거리감이 쉽게 생긴다. 우리는 그 거리를 유지한 채 풍경을 바라보거나, 때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이미지를 넘겨버린다.

풍경사진을 바라보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그 독법은 크게 두 측면으로 나눠볼 수 있었다. 한쪽에서는 풍경 사진을 신비주의를 통해 이해하며 작가의 내면이나 현실 너머를 드러내는 매개로 본다. 풍경 사진이 만드는 흐릿한 시야, 분산된 원근과 여백은 보이는 세계로부터 벗어나 다른 차원의 감각을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¹ 다른 한쪽에서는 풍경사진이 변화하는 풍경 속 시공간의 단절을 기록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한다고 본다. 장소가 끊임없이 변화할 때 풍경을 촬영한 사진은 그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낸다는 것이다. 2 그렇게 한 축은 풍경을 보이는 것 너머의 은유로 만들고 다른 한 축은 풍경을 보이는 것 안의 현실로 만든다. 하지만 두 관점 모두 사진 속 풍경을 해석 가능한 의미로 수렴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 풍경 사진이라면 조금 다른 위치에 있는 듯도 하다. 풍경은 일이 일어나는 현장과 다르고, 사건이나 사물,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과도 다르다. 풍경을 나타내다가도 자연스럽게 장소를 지시하게 된다. 풍경사진을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 맺히는 이미지가 저마다 다른 것도 이러한 풍경의 불특정성 때문일 것이다. 풍경 안에는 분명한 대상들이 있지만 그중 무엇도 자신을 보라고 외치지 않는다. 풍경은 스스로 대상이 되거나 사건의 잔여가 된다. (사건 당시를 실감나게 찍은 사진은 찍히는 순간 그 사건을 재현하는 스펙터클로 남기 마련이다.) 풍경은 다가가서 보는 것보다는 희미하게 바라보는 것이 어울린다. 그래서 풍경사진을 볼 때는 찍힌 풍경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 사이의 거리감이 쉽게 생긴다. 우리는 그 거리를 유지한 채 풍경을 바라보거나, 때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이미지를 넘겨버린다.

풍경사진을 바라보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그 독법은 크게 두 측면으로 나눠볼 수 있었다. 한쪽에서는 풍경 사진을 신비주의를 통해 이해하며 작가의 내면이나 현실 너머를 드러내는 매개로 본다. 풍경 사진이 만드는 흐릿한 시야, 분산된 원근과 여백은 보이는 세계로부터 벗어나 다른 차원의 감각을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¹ 다른 한쪽에서는 풍경사진이 변화하는 풍경 속 시공간의 단절을 기록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한다고 본다. 장소가 끊임없이 변화할 때 풍경을 촬영한 사진은 그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낸다는 것이다. 2 그렇게 한 축은 풍경을 보이는 것 너머의 은유로 만들고 다른 한 축은 풍경을 보이는 것 안의 현실로 만든다. 하지만 두 관점 모두 사진 속 풍경을 해석 가능한 의미로 수렴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1 황명, 공일범, 임안나(2025), 「신비주의 관점에서 본 풍경사진의 정신성과 공간미 연구」

2 임수진, 이주은(2018), 「도시 풍경사진에 재현된 시간성」

홍진훤의 풍경 사진들을 쭉 확인하고자 작업물이 정리된 작가의 사이트에 여러 차례 접속했다. 그가 찍어온 사진들은 대부분 풍경 사진이고 일부는 풍경 사진이 아니다. 그런데 풍경 사진이 아닌 사진들조차도 풍경으로 수렴하는 듯한 감각이 계속 있었고 그 감각에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되었다. 홍진훤의 사진은 다른 풍경 사진과 나란히 놓고 잘 찍혔는지, 무엇을 보여주는지를 비교하는 방식으로는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의 사진은 사진이 가진 익숙한 힘, 즉 피사체를 선택하고 그것을 이미지의 중심으로 만드는 힘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홍진훤은 풍경 사진을 사건으로도, 대상으로도 완성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는 풍경 사진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홍진훤은 이번 전시에서 풍경사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풍경 사진은 바라봄이라는 상태가 시각화된 결과이자, 바라봄의 연쇄 속에서만 의미가 발생하는 사진 형식이다. … 관성이 작동을 멈추고 오직 ‘무엇’의 연쇄에서 탈락한 불완전한 인간의 바라봄만이 축적된다. 이것이 전지구적 비극 앞에서 풍경 사진을 떠올리는 이유다.’³

홍진훤은 작가로서 이러한 사진 이미지를 꾸준히 생산해왔다. 그는 본래 집회를 따라다니며 사실을 알리고 현장을 보여주는 사진을 찍는 기자였다. 그러나 그러한 사진에 의심을 품게 되면서 사진을 활용해 의문을 던지는 작업들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첫 작업〈임시풍경〉부터 홍진훤은 사진을 통해 사건에 곧장 도달하지 않고 헛돌기 시작한다. 〈임시풍경〉은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도시를 멀리서 또 가까이서 촬영하며 언제나 임시적일 수밖에 없는 도시 풍경을 보여준다. 관객은 그 개발의 인과관계에 감상적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지나가고 있는 혹은 이미 지나간 임시 상태에 맴돌게 된다. 이후〈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에서는 그 헛돎이 더욱 분명해진다. 세월호의 흔적을 찾고자 제주로 향했지만 그가 마주한 것은 아이들이 있었을 장소이자 사건과 무관하게 지금 있는 풍경과 사물들이었다. 사진 안에는 가능성과 무응답의 괴리와 찾을 것이 없다는 무력감이 남는다.〈채널 256〉에서도 작가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풍경에서 혁명과 강제이주의 흔적을 읽으려 하지만, 현재의 풍경은 과거의 사건을 그대로 증명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를 알고 있는 자신이 현재의 장소에 과거를 겹쳐 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사건과 장소, 기억과 현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묻게 될 때 도달하지 않고 헛도는 사진들은 눈을 벗어난다. 의도를 파악하고 대상을 찾아내는 과정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홍진훤이 이어온 작업은 무엇인가를 찾아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무엇과 무엇을 연결할 수 있는지, 또 그 연결이 어디에서 끊어지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홍진훤의 풍경 사진은 이후의 풍경을 미리 소환하며 존재한다고 말해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찍으려는 범위를 정하고 찍히는 장면을 특정한 의미로 묶는다. 그렇게 찍히는 만큼을 가두고 절단하고 은폐하는 자체의 속성으로 인해 사진은 예기치 않게 동시에 두 가지의 실패를 하게 된다. 무언가를 완전히 드러내 보이지 못하는 것, 즉 이미지 내부의 실패와 완전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달하지 못하는 것, 즉 솔직해지기의 실패이다.

이러한 실패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선명해진다. 사진은 언젠가 정해진 맥락에서 분리되기 때문이다. 필립 멍크(Philip Monk)에 따르면 사진 이미지는 시간이 지나 이미지가 오래되면 기호적 가치가 약해지고 그때 비로소 사진이 지시대상으로부터 분리된 채 비어 있는 암호임이 드러난다. 처음에는 장소와 사건을 가리키던 사진이 시간이 흐르면서 그 지시대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사진은 대상을 붙잡는 순간부터 이미 그것으로부터 멀어진다. 사실 모든 사진은 언제나 과거의 빛이며 더 오래된 과거의 빛을 통해 우리의 눈에 맺히고 있다. 현재를 본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이미 지나간 빛을 통해 본다.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시대착오는 근본적으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신작 〈사실 은하수는 유령입니다〉은 연결과 단절, 그리고 시대착오를 넘어 재연결을 시도하는 작업이다. 사진이 찍힌 장소와 연도, 지형도, 안톤 판네쿡의 연구 이미지 그리고 정치적 사건과 관계된 풍경 사진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함께 놓인다. 캡션은 사진이 어디에서 언제 찍혔는지를 알려주지만 왜 이곳이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지형도 역시 사진의 위치를 알려줄 뿐 그 위치의 이유를 필연으로 만들지 않는다. 안톤 판네쿡은 은하수가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 주체의 능동성이 결합하여 형성된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가 아는 은하수와 실제 은하수 사이에는 반드시 착오가 있다. 은하수는 환영이면서도 완전한 환영은 아닌 중간적 존재이다. 그리고 그것은 홍진훤의 풍경이면서 완전한 풍경은 아닌, 사진이 만들어내는 이물감과 닮아 있다. 그렇게 판네쿡의 은하수 연구 이미지 역시 단순한 설명자료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보고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하나의 층위로 들어온다.

홍진훤은 비유와 사실을 함께 제공하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사건이나 서사로 곧장 결합하게 두지는 않는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진은 무엇을 보여주는 단출한 이미지가 아니라 서로 떨어져 있는 것들 사이의 관계를 일으키는 장치가 된다. 홍진훤은 사진의 명료한 힘을 없애는 대신 그 방향을 바꾼다. 무엇을 보여주는 힘에서 무엇과 무엇을 연결하고 그 연결을 다시 의심하게 만드는 힘으로. 그렇게 그의 사진은 무력한 이미지가 아니라 작동하는 이미지가 된다.

한편 풍경 사진이라면 조금 다른 위치에 있는 듯도 하다. 풍경은 일이 일어나는 현장과 다르고, 사건이나 사물,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과도 다르다. 풍경을 나타내다가도 자연스럽게 장소를 지시하게 된다. 풍경사진을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 맺히는 이미지가 저마다 다른 것도 이러한 풍경의 불특정성 때문일 것이다. 풍경 안에는 분명한 대상들이 있지만 그중 무엇도 자신을 보라고 외치지 않는다. 풍경은 스스로 대상이 되거나 사건의 잔여가 된다. (사건 당시를 실감나게 찍은 사진은 찍히는 순간 그 사건을 재현하는 스펙터클로 남기 마련이다.) 풍경은 다가가서 보는 것보다는 희미하게 바라보는 것이 어울린다. 그래서 풍경사진을 볼 때는 찍힌 풍경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 사이의 거리감이 쉽게 생긴다. 우리는 그 거리를 유지한 채 풍경을 바라보거나, 때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이미지를 넘겨버린다.

풍경사진을 바라보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그 독법은 크게 두 측면으로 나눠볼 수 있었다. 한쪽에서는 풍경 사진을 신비주의를 통해 이해하며 작가의 내면이나 현실 너머를 드러내는 매개로 본다. 풍경 사진이 만드는 흐릿한 시야, 분산된 원근과 여백은 보이는 세계로부터 벗어나 다른 차원의 감각을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¹ 다른 한쪽에서는 풍경사진이 변화하는 풍경 속 시공간의 단절을 기록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한다고 본다. 장소가 끊임없이 변화할 때 풍경을 촬영한 사진은 그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낸다는 것이다. 2 그렇게 한 축은 풍경을 보이는 것 너머의 은유로 만들고 다른 한 축은 풍경을 보이는 것 안의 현실로 만든다. 하지만 두 관점 모두 사진 속 풍경을 해석 가능한 의미로 수렴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 풍경 사진이라면 조금 다른 위치에 있는 듯도 하다. 풍경은 일이 일어나는 현장과 다르고, 사건이나 사물,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과도 다르다. 풍경을 나타내다가도 자연스럽게 장소를 지시하게 된다. 풍경사진을 떠올렸을 때 머릿속에 맺히는 이미지가 저마다 다른 것도 이러한 풍경의 불특정성 때문일 것이다. 풍경 안에는 분명한 대상들이 있지만 그중 무엇도 자신을 보라고 외치지 않는다. 풍경은 스스로 대상이 되거나 사건의 잔여가 된다. (사건 당시를 실감나게 찍은 사진은 찍히는 순간 그 사건을 재현하는 스펙터클로 남기 마련이다.) 풍경은 다가가서 보는 것보다는 희미하게 바라보는 것이 어울린다. 그래서 풍경사진을 볼 때는 찍힌 풍경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 사이의 거리감이 쉽게 생긴다. 우리는 그 거리를 유지한 채 풍경을 바라보거나, 때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이미지를 넘겨버린다.

풍경사진을 바라보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그 독법은 크게 두 측면으로 나눠볼 수 있었다. 한쪽에서는 풍경 사진을 신비주의를 통해 이해하며 작가의 내면이나 현실 너머를 드러내는 매개로 본다. 풍경 사진이 만드는 흐릿한 시야, 분산된 원근과 여백은 보이는 세계로부터 벗어나 다른 차원의 감각을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¹ 다른 한쪽에서는 풍경사진이 변화하는 풍경 속 시공간의 단절을 기록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재현한다고 본다. 장소가 끊임없이 변화할 때 풍경을 촬영한 사진은 그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낸다는 것이다. 2 그렇게 한 축은 풍경을 보이는 것 너머의 은유로 만들고 다른 한 축은 풍경을 보이는 것 안의 현실로 만든다. 하지만 두 관점 모두 사진 속 풍경을 해석 가능한 의미로 수렴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3 2026 올해의 작가상, 작업 캡션 중

4 에른스트 판알펀(김남시 역), 『실패한 이미지』, 안그라픽스, p227

이러한 작동-시킴은 홍진훤의 사진을 단순히 ‘무엇이 되지 않는 이미지’라고 말하는 것보다 흥미롭게 만드는 지점이다. 그의 풍경사진은 정보를 없애지는 않는다. 그러나 장소를 장소답게 보여주지 않고, 풍경을 초월적인 은유로 끌어올리지 않으며 사건을 실감나게 재현하지 않는다. 텍스트와 이미지는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서로를 완성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사진들이 착하게 느껴졌다. 텍스트와 풍경 사진 그리고 은하수를 연구한 흔적까지 작업의 내부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이미지를 해독하고 그것이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했기 때문이다. 여행 중 감상에 젖어 찍은 사진인지 고향에 내려와 변해 버린 방의 내부를 찍은 사진인지 파악할 수 없는 사진은 실패를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정확히 보여주는 사진이 끝내 다른 무엇을 말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보는 이로 하여금 직시하게 한다. 그는 어쩌면 이미지의 솔직한 등장을 염원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함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다. 내가 홍진훤의 사진이 착하다고 느끼는 것은 작가 자신의 고유성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의 성찰이 드러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풍경사진에서 시작한 글은 작동하는 사진을 거쳐 어느새 착한 사진을 향하고 있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사진 작업을 시작하기 전 상당한 내적 갈등을 겪었다. 끝까지 나를 붙들었던 것은 이미 수많은 사진들이 눈앞에 당도해 있는데, 나의 세계를 아름다운 이미지로 내보이고 싶다는 이유로 사진을 생산하는 게 필요한지에 답할 수 없는 막막함이었다. 심미적으로 훌륭한 사진들을 보면서 그것을 원하면서도 비판적인 시선을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모순을 질문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사진 자체가 착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착하다는 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보이는 것의 이면과 옆면을 떠올릴 수 있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사진은 본래 착한 매체가 아니다. 촬영할 장면 또는 피사체를 선택하고 프레임을 만드는 순간부터, 피사체를 구하고 협조하게 만드는 일에서부터 이미 일방적인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착한 사진은 힘이 없는 사진도, 해악을 끼치지 않는 사진도,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사진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해지는지를 상상하게 하는 사진에 가까울 것이다. 착한 사진은 자신이 보여주는 것을 단일한 의미로 독점하지 않는다. 그리고 단단한 명사가 되기보다는 미끄러지는 동사로 열린 채 사진-하기와 사진-되기를 메타적으로 오간다.

처음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은 잘 찍은 초상사진이 그 사람의 내면 상태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믿었다. 사진 이미지의 현전성이 낳은 자동적인 믿음은 오늘날까지 사진 감상의 과정에 유령처럼 남아 있다. 그러나 어떤 사진에도 전부는 없다. 홍진훤은 이를 깨진 하이퍼링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하며 설명한다. 사진으로 대상을 가리키게 되지만, 그 대상이 늘 그대로 있지 않는다는 단절을 드러내는 것. 그는 볼만한 ‘무엇’을 위해 작동하거나 그 ‘무엇’을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대항하여 밋밋한 이미지를 내놓았다.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지만 그가 근 몇 년간 아카이브를 들춰 파편을 늘어놓고 느슨히 묶는 영상 작업을 해온 것 역시 한계를 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작동-시킴은 홍진훤의 사진을 단순히 ‘무엇이 되지 않는 이미지’라고 말하는 것보다 흥미롭게 만드는 지점이다. 그의 풍경사진은 정보를 없애지는 않는다. 그러나 장소를 장소답게 보여주지 않고, 풍경을 초월적인 은유로 끌어올리지 않으며 사건을 실감나게 재현하지 않는다. 텍스트와 이미지는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서로를 완성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의 사진들이 착하게 느껴졌다. 텍스트와 풍경 사진 그리고 은하수를 연구한 흔적까지 작업의 내부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이미지를 해독하고 그것이 어떻게 인식되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했기 때문이다. 여행 중 감상에 젖어 찍은 사진인지 고향에 내려와 변해 버린 방의 내부를 찍은 사진인지 파악할 수 없는 사진은 실패를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인가를 정확히 보여주는 사진이 끝내 다른 무엇을 말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보는 이로 하여금 직시하게 한다. 그는 어쩌면 이미지의 솔직한 등장을 염원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함을 안타까워하는 사람이다. 내가 홍진훤의 사진이 착하다고 느끼는 것은 작가 자신의 고유성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의 성찰이 드러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풍경사진에서 시작한 글은 작동하는 사진을 거쳐 어느새 착한 사진을 향하고 있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사진 작업을 시작하기 전 상당한 내적 갈등을 겪었다. 끝까지 나를 붙들었던 것은 이미 수많은 사진들이 눈앞에 당도해 있는데, 나의 세계를 아름다운 이미지로 내보이고 싶다는 이유로 사진을 생산하는 게 필요한지에 답할 수 없는 막막함이었다. 심미적으로 훌륭한 사진들을 보면서 그것을 원하면서도 비판적인 시선을 거둘 수 없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모순을 질문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사진 자체가 착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착하다는 건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보이는 것의 이면과 옆면을 떠올릴 수 있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사진은 본래 착한 매체가 아니다. 촬영할 장면 또는 피사체를 선택하고 프레임을 만드는 순간부터, 피사체를 구하고 협조하게 만드는 일에서부터 이미 일방적인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무엇을 보여주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착한 사진은 힘이 없는 사진도, 해악을 끼치지 않는 사진도,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사진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해지는지를 상상하게 하는 사진에 가까울 것이다. 착한 사진은 자신이 보여주는 것을 단일한 의미로 독점하지 않는다. 그리고 단단한 명사가 되기보다는 미끄러지는 동사로 열린 채 사진-하기와 사진-되기를 메타적으로 오간다.

처음 사진이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은 잘 찍은 초상사진이 그 사람의 내면 상태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믿었다. 사진 이미지의 현전성이 낳은 자동적인 믿음은 오늘날까지 사진 감상의 과정에 유령처럼 남아 있다. 그러나 어떤 사진에도 전부는 없다. 홍진훤은 이를 깨진 하이퍼링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하며 설명한다. 사진으로 대상을 가리키게 되지만, 그 대상이 늘 그대로 있지 않는다는 단절을 드러내는 것. 그는 볼만한 ‘무엇’을 위해 작동하거나 그 ‘무엇’을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대항하여 밋밋한 이미지를 내놓았다.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지만 그가 근 몇 년간 아카이브를 들춰 파편을 늘어놓고 느슨히 묶는 영상 작업을 해온 것 역시 한계를 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이었을 것이다.

5 우리가 가늠할 수도 없는 아주 먼 과거에서 출발한 그 빛을 지금, 여기에서 내가 보고 있다. 한 공간에 무수한 시간이 혼재한다.

사진이라는 것이 시간이라는 물질을 붙잡아보려는 인간의 욕망이라면 그것의 처참한 실패를 맞보는 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다. (홍진훤, <가장 처음의 처음시간>, 2014-2015 작가노트 증)

6 안소현, 홍진훤, 『사진에 관한 대화』,현실문화 A, p88-89

〈창 밖 풍경(1826), View from the Window at Le Gras〉

〈창 밖 풍경(1826), View from the Window at Le Gras〉

풍경 사진은 언제나 조금 비어 있는 채로 있다. 한 작가의 시리즈나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풍경 사진은 보통 강렬한 사진들 사이에 놓여 감상을 환기하거나 다루는 주제의 분위기를 원경에서 보여주는 역할을 해왔다. 그렇지 않으면 특정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을 함께 다루거나 자연 자체의 경이를 담곤 했다. 마치 우리가 휴대전화로 비슷한 풍경을 여러 장 찍고 그중 한 장만 남기듯 풍경사진은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며 무엇을 보여주기 어렵기에 다른 이미지들 사이에서 선택적으로 기능해 왔다. 하지만 홍진훤은 그런 풍경사진을 전면에 두고 현대의 사진과 이미지,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자신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해지는지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식하게 하는 사진은 어떤 비판도 어떤 옹호도 모두 수용할 수 있으며 스스로 뚜렷한 무엇을 표상할 수 없는 이미지임을 알기에 떳떳하고 착한 사진이 된다.

한편 그 착함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며 반드시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홍진훤이 메타적인 위치에서 사진의 작동을 드러내고자 미루거나 버려야 했던 것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미지의 한계 내에서 무언가를 명확히 지시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미뤄졌다. 한계를 직시하지 않고 안에 머물 때만 가능한 감각과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미를 유보하고 관계를 다시 엮는 방법론은 때로는 새로운 감각을 만들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서 현 상황을 진단하는 특유의 스타일로 고착될 수도 있다. 무엇도 확정하지 않으며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늘 새롭고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 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착한 사진과 작업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이미지의 우주가 생기고 그 우주가 여러 개로 확장되어 이미지와 이미지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된 이 시대의 가능성 혹은 윤리를 묻는 질문일 것이다.

글로 분명한 대답을 내놓을 수는 없겠지만, 홍진훤이 관객에게 능동적인 반성을 유도할 때 생긴 자리처럼, 바라보는 시선을 계속 다각화하여 새로운 자리들을 만드는 것은 착한 사진이 꾸준히 해낼 일이다. 보드리야르는 인간이 기술의 극단에 이르면 자신을 추방하는 인위적 세상에 자리를 넘기고 사라지며, 그 세계는 더 이상 그것을 바라볼 사람도, 재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⁷ 이런 세상이라면 자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미리 정하기보다는 어디에 이를지라도 세계를 착하게, 풍경을 보듯 바라보는 자리를 잃지 않는 자세가 중요할 것이다.⁸ 피할 수 없는 사라짐을 직시하려는 사진이 어떤 자리를 만들어갈지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 다만 홍진훤의 작업의 궤적이 사진을 포함한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을 다른 자리에서 바라볼 가능성을 여는 하나의 자리임은 분명해 보인다.

풍경 사진은 언제나 조금 비어 있는 채로 있다. 한 작가의 시리즈나 다큐멘터리 작업에서 풍경 사진은 보통 강렬한 사진들 사이에 놓여 감상을 환기하거나 다루는 주제의 분위기를 원경에서 보여주는 역할을 해왔다. 그렇지 않으면 특정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을 함께 다루거나 자연 자체의 경이를 담곤 했다. 마치 우리가 휴대전화로 비슷한 풍경을 여러 장 찍고 그중 한 장만 남기듯 풍경사진은 그 자체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며 무엇을 보여주기 어렵기에 다른 이미지들 사이에서 선택적으로 기능해 왔다. 하지만 홍진훤은 그런 풍경사진을 전면에 두고 현대의 사진과 이미지,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다. 자신이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해지는지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식하게 하는 사진은 어떤 비판도 어떤 옹호도 모두 수용할 수 있으며 스스로 뚜렷한 무엇을 표상할 수 없는 이미지임을 알기에 떳떳하고 착한 사진이 된다.

한편 그 착함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며 반드시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홍진훤이 메타적인 위치에서 사진의 작동을 드러내고자 미루거나 버려야 했던 것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미지의 한계 내에서 무언가를 명확히 지시하고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미뤄졌다. 한계를 직시하지 않고 안에 머물 때만 가능한 감각과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미를 유보하고 관계를 다시 엮는 방법론은 때로는 새로운 감각을 만들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서 현 상황을 진단하는 특유의 스타일로 고착될 수도 있다. 무엇도 확정하지 않으며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늘 새롭고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 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착한 사진과 작업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이미지의 우주가 생기고 그 우주가 여러 개로 확장되어 이미지와 이미지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없게 된 이 시대의 가능성 혹은 윤리를 묻는 질문일 것이다.

글로 분명한 대답을 내놓을 수는 없겠지만, 홍진훤이 관객에게 능동적인 반성을 유도할 때 생긴 자리처럼, 바라보는 시선을 계속 다각화하여 새로운 자리들을 만드는 것은 착한 사진이 꾸준히 해낼 일이다. 보드리야르는 인간이 기술의 극단에 이르면 자신을 추방하는 인위적 세상에 자리를 넘기고 사라지며, 그 세계는 더 이상 그것을 바라볼 사람도, 재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⁷ 이런 세상이라면 자리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미리 정하기보다는 어디에 이를지라도 세계를 착하게, 풍경을 보듯 바라보는 자리를 잃지 않는 자세가 중요할 것이다.⁸ 피할 수 없는 사라짐을 직시하려는 사진이 어떤 자리를 만들어갈지는 아직 정해져 있지 않다. 다만 홍진훤의 작업의 궤적이 사진을 포함한 무수히 많은 이미지들을 다른 자리에서 바라볼 가능성을 여는 하나의 자리임은 분명해 보인다.

7 보드리야르(하태완 역), 『사라짐에 대하여』, 민음사, p19

8 “세상이 바뀌면 거기에 대응하는 게 제 방식이니까요.” 2026년 3월 4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올해의 작가상 인터뷰 중

“어차피 인간의 판단이나 말을 잘 믿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그곳을 향해 출발한다고 언제나 그곳에 도착하는 건 아니니까요.

안소현, 홍진훤, 『사진에 관한 대화』, 현실문화A, p51

© eyes eat everyda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