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영화를 볼 때면 종종 스틸컷을 떠올려 보곤 한다. 영화에 몰입한 상태에서 잠시 벗어나면 움직이고 있는 존재가 멈춘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 방금 지나간 장면이 잠시 머물렀다면, 뒤돌아 흘깃 넘보는 인물의 몸이 영원히 한 장면에 갇혀 있다면, 어떨까. 영화 속 인물은 계속 움직이며 서사를 이끌어 가지만 사진 속 인물은 하나의 포즈 안에 머문다. 움직임을 잃은 몸은 더 이상 이야기의 일부가 아니라 어디서 많이 본 인물 사진 같은 존재가 된다. 그렇게 영화에서 사진으로, 움직임에서 정지로 옮겨 갈 때마다 포트레이트라는 익숙한 단어가 머릿속을 떠다니곤 했다.
포트레이트는 흔히 초상사진으로 번역되며 초상화에 기원을 둔다. 그래서인지 포트레이트를 막연히 떠올리면 인물이 렌즈를 응시한 채 찍힌 강렬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하지만 포트레이트를 이리저리 굴려보면 볼수록 그 정체는 꽤 미심쩍다. 어떤 존재를 드러내는 데 있어서 그 존재의 대표적인 부분(사람이라면 얼굴)이 크게 담겨 있다고 해서 혹은 그 존재가 카메라를 또렷이 응시한다고 해서 포트레이트가 되는 걸까? 사람을 찍은 사진이 반드시 인물 포트레이트가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얼굴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사진일지라도 인물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면 포트레이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혼탁한 상태를 버려 보려는 열망에서 이 글은 출발하게 되었다.
포트레이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폭과 정도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대체로 사진가와 피사체 사이의 교류가 깃든다. 이에 이 글에서는 사진가의 선택과 지시 그리고 그에 대한 피사체의 응답을 거치며 사진이 발생하는 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이를 위해 개별 사진이 아니라 사진책에 등장하는 인물 사진들을 주목한다. 물론 사진은 한 장으로도 포트레이트가 완결될 수 있다. 그러나 사진책은 사진들의 반복과 배열을 통해 인물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조직하기에 포트레이트의 형식뿐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관계성까지 품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네 권의 사진책을 통해 포트레이트를 새롭게 바라보고 그 경계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보고자 한다.
처음으로 살펴볼 사진책은 Mark Steinmetz의 <Summer Camp>¹이다. 이 책은 1984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의 여름 캠프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을 담은 사진들로 엮여 있다. Steinmetz는 캠프를 수차례 방문하여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이 책에서는 정면을 바라보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가 반복적으로 교차하며 등장하는데 이때 흥미로운 지점은 아이들이 길거리 스냅 속 인물들처럼 찍히는 상황 자체를 모르고 찍힌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잔 손택은 사람들에게는 관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을 때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 무언가가 관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때에 드러난다고 말한다.² 그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Steinmetz는 카메라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을 선택한다. 지시를 최소화하는 대신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카메라가 일상이 되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카메라를 의식하는 여부가 아니라 카메라와 맺는 관계에 관심을 두었기에 아이들은 카메라의 존재를 알면서도 카메라가 있는 상태를 유별난 사건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2 Susan Sontag, On photography(New York, 1977), p37

따라서 <Summer Camp> 속 인물에 집중된 사진들은 단순한 스냅도, 연출된 포트레이트도 아니다. 책에는 렌즈를 바라보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응시는 카메라를 향해 자신을 보여주려는 흔적이 아니다. 오히려 카메라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리듬으로 돌아간 상태에서 일상적인 사물을 보듯 카메라를 바라본 것에 가깝다. 그래서 사진 속 아이들은 카메라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카메라 앞에서도 자신의 상태를 유지한다. 젖은 머리, 아직 정리되지 않은 손, 몸의 긴장과 이완이 동시에 남은 자세는 어떤 상태를 만들고 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아이가 만드는 분위기에 주목하게 된다.
이는 바르트가 말하는 주의³를 떠올리게 한다. 바르트는 사진을 대상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닌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분위기로 관객의 시선을 오래 붙잡는 매체라고 본다. 사진은 우선 인물을 인식(perception)하게 만들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 존재 앞에 머물게 하는 주의(attention)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Summer Camp> 속 아이들은 자신을 열심히 보여주지 않지만, 그렇기에 관객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존재감 앞에 오래 머물게 된다.
3 바르트는 영화적인 허구의 세계를 인정하고 관객에게 암시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서사구조의 영화를 좋아했지만, 영화가 사진의 정면 포즈를 포기한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사진은 주의력과 지각을 분리시키고 전자만을 전달하는 것 같지만 , 후자 없이는 불가능하다. (마이클 프리드, 『예술이 사랑한 사진』, 구보경 조성지 역, 월간 사진, p120)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주의'가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젖은 긴 머리카락을 보인 아이의 사진에서 관객은 그 아이의 표정을 읽을 수도, 시선을 마주할 수도 없지만, 그를 단순한 풍경의 일부로 경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젖은 머리카락의 결, 등을 둥글게 말고 앉아 있는 몸의 자세는 하나의 존재를 감각하게 만들며, 관객의 시선을 오래 머물게 한다. 여기서 포트레이트가 반드시 얼굴이나 정면 응시를 통해 성립하는 것이 아닌 존재가 사진 안에서 하나의 밀도를 획득하는 방식으로도 작동할 여지가 생긴다. 그렇게 <Summer Camp>는 포트레이트를 얼굴의 재현으로 이해하는 익숙한 관념을 비껴 간다.

다음으로 살펴볼 <This is not the right time>⁴은 이러한 가능성을 한 걸음 더 밀고 나간다. Peter Pflü gler는 20여 년간 가족 안에 감춰져 있던 아버지의 자살 시도와 그 침묵을 추적하여 가족의 기억과 세대 간 트라우마를 엮어낸다. 이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의 얼굴보다도 침묵이 남긴 흔적과 가족 구성원 사이의 관계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전형적인 의미의 포트레이트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면을 향하는 인물의 이미지는 눈 덮인 마당에 걸린 어머니의 결혼사진이 전부이다. 그마저도 현재의 인물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인물의 과거 사진을 찍은 사진으로 제시되고 있다. 책의 중심에 있는 아버지는 직접적인 초상으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풀숲에 등을 보인 채 서 있는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그렇게 Pflü gler는 정면의 부재를 통해 가족의 초상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가족들은 아버지를 둘러싼 기억을 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Pflügler가 주도하는 재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빵을 한가득 안은 채 고개를 돌리고 있는 어머니, 몸 대부분을 천으로 감싼 아이, 그리고 연출하고 있음을 전면에 드러내는 흰 배경지 앞에서 기울어진 의자 위에 한발로 위태롭게 서 있는 익명의 남성은 특정한 사건을 재현하기보다 가족 내부에 남아 있는 기억의 구조를 시각화 한다. 이에 사진들은 장면의 일부로 등장하는 인물 사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얼굴을 통해심리를 드러내지도 않기에 거리감 또한 느껴진다. 그럼에도 관객은 이들을 단순한 등장인물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이며, 그 존재가 맺은 관계와 기억을 읽어낼 수 있다.
이는 기억을 재현할 수 있는 상황이 마련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Pflü gler는 가족의 기억을 작업의 중심에 두고 그 기억을 다시 수행하도록 장면을 조직한다. 그러나 그는 가족들의 몸짓과 표정, 자세를 하나의 형식으로 통제할 수 없다. 그들은 함께 경유한 기억을 자신만의 몸으로 드러내며, 그 응답의 차이가 각 인물을 유일한 존재로 만든다. 따라서 이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기억이 재현되었다는 사실보다, 그 재현의 과정에서 각 존재가 고유의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Steinmetz가 카메라 앞에서도 자신의 리듬을 회복한 순간을 통해 포트레이트를 확장했다면, Pflü gler는 몸짓과 주변을 통해 얼굴을 비추지 않으면서 기억과 고통을 체감하게 한다. 그렇게 포트레이트의 범위는 한층 더 넓어질 가능성을 얻는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책은 Bernhard Ruchs <Portrait Fotografien>⁵와 Erwin wurm <Photography>⁶이다. 두 작업 모두 특정한 사건이나 하나의 서사에 따라 진행되는 사진책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축적된 사진들을 묶은 결과물이다. 그러나 인물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두 작업은 서로 상반된다. Fuchs는 인물을 끝까지 포트레이트로 남겨 두려 하는 반면, Wurm은 인물을 조형적 재료로 해체한다. 하나는 포트레이트의 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다른 하나는 포트레이트가 아니게 되는 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Bernhard Fuchs의 <Portrait Fotografien>은 1994년부터 2001년까지 촬영한 인물 사진들을 엮은 사진집이다. 제목이 직접 드러내듯 이 책은 포트레이트 자체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러나 Fuchs의 사진 속 인물은 자신의 개성을 과장하지도, 카메라를 향해 감정을 전달하지도 않는다. 그는 촬영한 인물들의 직업이나 관계를 설명하지 않은 채 이름, 지역 그리고 촬영 년도만을 남긴다. 인물은 특정한 유형으로 환원되지 않고, 설명 이전의 상태로 카메라 앞에 선다.
이러한 방식은 <Summer Camp>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분리된다. 두 작업은 모두 피사체가 자신을 보여주려는 의식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는 순간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만나고 있다. 그러나 <Summer Camp> 속 아이들이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 익숙해지면서 자신의 리듬을 보여주었다면 Fuchs 의 인물들은 우연하고 일회적인 만남 속에서 사진을 찍히는 상황에 몰입하여 자신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찍힘에 깊이 몰입한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계산하지 않고 자기 망각(oubli de soi)⁷에 이른다.
Fuchs 는 낯선 사람에 가까운 사람을 피사체로 삼고 별다른 연출을 하지 않는 방식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셔터를 누른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인물을 카메라 앞에 세우고 촬영이라는 상황 자체에 몰입하도록 이끈다. 최소한의 개입 속에서 피사체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의식하기보다 사진 찍히는 행위 자체에 몰입해 스스로를 망각하는 형태로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Fuchs 에게 포트레이트는 단순히 연출된 자연스러움의 결과물이 아닌 사진가와 피사체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형성한 관계의 나타남이 된다.



한편 Erwin Wurm의 <Photography>에서 인물이 등장하는 사진들은 독립적인 포트레이트가 아니라 조각 작업의 일부이다. Wurm은 1986년부터 사진을 자신의 일시적인 조각(performance sculpture)을 기록하는 도구로 사용해 왔으며, 사진 역시 조각의 일부라고 말한다. 그의 작업에서 인물은 더 이상 초상의 대상이 아니라 조형적 재료가 된다. 몸은 구부러지고 접히며 사물과 결합하고, 지시에 따라 비현실적인 자세를 취한다. 여기서 사진가의 지시는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 피사체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조형적 형태를 완성하는데 협조하는 방식으로 그 지시에 응답한다. 이때의 응답은 지시한 형태를 만드는 것에 가깝기에 그렇게 찍힌 사진은 포트레이트에서 벗어난다. 사진 속에는 분명 사람이 등장하지만, 관객의 관심은 그 사람이 누구인가보다 형상 자체의 조형성으로 향한다.
주목해 볼 지점은 이 사진들이 다른 맥락에 놓였다면 충분히 포트레이트로 읽힐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진 속에는 분명 한 사람이 카메라 앞에 서 있으며, 몸짓과 시선 또한 그 사람을 응시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Photography> 안에서 이들은 특정 인물을 드러내기보다 조형적으로 인물을 실험한 이미지들로 기능한다. 동일한 인물 사진이라도 그것이 어떤 작업 안에 배치되고 무엇을 향해 조직되는가에 따라 포트레이트가 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두 작업을 나란히 놓고 보면 포트레이트는 더 이상 '연출인가 비연출인가', '정면 응시인가 아닌가'와 같은 기준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Fuchs 는 최소한의 개입 속에서도 피사체와의 관계를 조직하며 포트레이트를 만든다. Wurm 은 그 관계 자체를 조형적 실험으로 확장하면서 포트레이트에서 벗어난다. 결국 포트레이트를 규정하는 것은 외형적인 형식이 아니라, 사진가와 피사체와 어떤 관계를 설정하고 그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이미지 안에 구성하는가에 있다.
7 스트루스의 가족 초상과 딕스트라의 해변기 사춘기 아이들의 사진들에서 사진 찍힘에의 몰입은 명백한 자기 망각(Oubli de soi) 효과를 불러일으키며 전통적인 반대 명제를 대신한다. (...) '망각'(Forgetting)은 무언가에 몰입된 사람이 자신의 환경을 의식하지 않음을 기술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마이클 프리드, 『예술이 사랑한 사진』, 구보경 조성지 역, 월간 사진, p238-239)
지금까지 포트레이트가 완성된 장르가 아닌 선택과 지시 그리고 응답 상황을 구성하는 방식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지는 형식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포트레이트의 관념을 하나씩 철회하는 과정이었다. <Summer Camp>는 오랜 시간을 공유하며 형성된 관계 속에서 포트레이트를 만들었고, <This is not the right time>은 얼굴보다 기억과 서사를 통해 존재를 드러냈다. <Portrait Fotografien>은 촬영이라는 상황 자체에 몰입한 피사체의 자기 망각을 포착했으며 <Photography>는 인물을 조형적 재료로 해체하기에 포트레이트의 경계를 건드렸다. 네 작업은 모두 사람을 찍고 있음에도 인물은 작업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들은 정면 응시, 얼굴의 클로즈업, 자연스러운 표정과 같은 익숙한 초상의 문법으로 읽히지 않는다.
물론 전통적인 포트레이트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인물 사진이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여전히 렌즈를 응시하는 얼굴에서 발견된다. 영화에서 연출의 흔적이 인지되는 순간(인물이 렌즈를 응시하거나 특정 배경과 물건이 세트와 소품임이 드러나는 등)은 종종 관객을 서사 밖으로 밀어내는 결함이나 감독의 중요한 의도로 작동한다. 그러나 사진 속 인물은 카메라 앞에 선 순간 이미 촬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거나, 혹은 그 존재를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카메라 앞에 서 있다는 의식, 어색한 자세, 연출의 흔적, 응시의 긴장은 감춰야 할 실패가 아니라 사진이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다.
사진가는 피사체에게 거리를 선택하고, 시선을 요청하거나, 몸의 방향을 제안한다. 피사체는 그 요구를 따르거나 거부하는 것 사이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응답한다. 어떤 이는 카메라를 일상의 일부처럼 받아들이고(Steinmetz), 어떤 이는 기억을 재현하며(Pflügler), 어떤 이는 촬영의 순간에 깊이 몰입하고(Fuchs), 또 어떤 이는 조형적 수행을 실행한다(Wurm). 포트레이트는 바로 이러한 선택과 지시, 그리고 응답이 하나의 이미지 안에 응결되는 순간에 성립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진은 새로운 인물을 창조하기보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과 카메라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그대로 품고 있기에 고유의 섬뜩함을 만들곤 한다.
그러니 포트레이트는 더 이상 사람을 보여주는 일정한 형식일 수 없다. 오히려 포트레이트는 촬영하는 이와 인물이 맺는 관계와 그것을 하나의 작업으로 구성하는 방식에 가깝다. 같은 사람을 찍더라도 어떤 관계 속에서 촬영이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그 관계가 하나의 작업 안에서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따라 포트레이트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관용적으로 사용해 온 포트레이트라는 단어의 혼탁함을 조금 더 예민하게 받아들인다면, 피사체를 어떻게 찍을 것인가보다 어떤 관계 속에서 드러낼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포트레이트는 바로 그 관계가 발생하는 순간, 예상하지 못한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는 언제나 사진가의 선택과 지시, 그리고 피사체의 응답이 숙덕거리고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