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yes eat everyday 2nd Photobook Gath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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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잔디 광장

평화의 잔디 광장

집으로 돌아간 사진들을 위하여

사진은 좀처럼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크기와 물성을 가진 채 머무는 회화나 조각과 달리, 사진은 어떤 방식으로 인화되고, 얼마나 확대되며, 어떤 형태로 설치되는지에 따라 매번 다른 작업 으로(처럼) 나타난다. 사진 매체는 전시의 맥락과 공간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된다. 한 장의 이미지는 의도에 따라 액자 안팎에 걸릴 수도, 책 속에 인쇄될 수도, 확장되어 벽면을 덮을 수 도, 영상처럼 연이어 상영될 수도 있다. 따라서 사진을 보여주는 일은 막막하다. 이렇게 사진은 이동하며 보여지는 운명을 타고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서울 곳곳을 경유하며 열리던 서울사진축제가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으로 ‘돌아왔다’ 는 선언 같은 사실은 흥미롭다. 2010년 시작한 서울사진축제는 2021년까지 매해 서울의 여러 공간에서 이어져 오다가 지난해 개관한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에서 5년 만에 다시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사진 시립미술관은 사진의 집을 자처하고 ‘컴백홈’을 2026년 서울사진축제의 주제로 내 걸었다. 떠돌던 사진들이 사진을 중심 매체로 다루는 미술관 안으로 들어오며 자신의 ‘집’을 갖게 된 셈이다. 이에 이러한 맥락 위에서 전시는 네 개의 섹션을 통해 집을 하나의 고정된 공간이 아닌 이동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장소로 제시한다. 오랫동안 부재했던 공공 사진미술관의 개관 후 열린 이번 축제는 한국 사진계에 있어 하나의 상징적인 장면이자 귀환의 장처럼 다가 온다.

그러나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돌아온다는 인식이 단순하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된다. 전시장 곳곳 에는 정착하지 못한 몸들, 사라지는 장소들, 임시적인 삶의 흔적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와 함께 서울시립사진미술관이라는 제도적 존재감 역시 강하게 드러난다. 떠돌며 흔들리는 작업들이 안정된 공간 안에 배치될 때의 격차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전시를 보며 몇 가지 질문들이 남았다. 새로운 ‘집’ 안에 모여 분류된 사진들은 여전히 미결로 남아 떠도는 집들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을까. 혹은 ‘집’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 많은 감각과 서사를 포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물음을 따라 특정한 작업 앞에서 느꼈던 균열과 작업들 사이에서 발생했던 관계들에 조금 더 집중해보고자 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작업과 그렇지 않은 작업의 차이는 선호나 우열에 있지 않다. 다만 서로 다른 작업들이 연결되거나 어긋나는 순간들을 따라가며, 연결의 즐거움과 끝내 남겨졌던 껄끄러움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

첫 번째 섹션인 ‘집을 이루는 것’은 비교적 어두운 조도의 공간에서 시작된다. 오석근, 박형렬, 정경자, 한영수의 작업은 각기 다른 시대와 풍경을 경유하며 배제해둔 풍경과 집을 집으로 만들어온 요소들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호출한다. 오래 시선이 머문 작업은 한영수의 〈서울〉 연작이었다. 전후 서울의 거리와 골목을 담은 사진에서 집은 실내가 아니라 사람과 움직임이 교차하는 도시의 풍경에 가깝다. 꽃을 머리에 이고 지나가는 여성들, 골목을 뛰노는 아이들의 장면은 생활의 리듬 자체를 집으로 확장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직전에 마주했던 정경자의 작업과 이어지면서도 대비되고 있다. 두 작업 모두 객관적인 공간보다도 개인에 의해 정지가 일어난 장소1로서의 집을 다룬다. 정경자는 부재와 기억을 따라가며 집을 내면화된 장소로 끌어들인다. 한영수는 거리에 나가 집의 반경을 도시의 광경까지 열어낸다. 정경자가 익숙한 집 그리고 머무름과 이동이 교차하는 호텔을 가깝고 낯설게포착한다면, 한영수의 서울 사진들은 거리 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짓과 생활의 리듬을 새로운 순간으로 재구성한다. 그렇게 두 작업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집을 이루는 것 사이의 긴장을 만든다.

집으로 돌아간 사진들을 위하여

사진은 좀처럼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크기와 물성을 가진 채 머무는 회화나 조각과 달리, 사진은 어떤 방식으로 인화되고, 얼마나 확대되며, 어떤 형태로 설치되는지에 따라 매번 다른 작업 으로(처럼) 나타난다. 사진 매체는 전시의 맥락과 공간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된다. 한 장의 이미지는 의도에 따라 액자 안팎에 걸릴 수도, 책 속에 인쇄될 수도, 확장되어 벽면을 덮을 수 도, 영상처럼 연이어 상영될 수도 있다. 따라서 사진을 보여주는 일은 막막하다. 이렇게 사진은 이동하며 보여지는 운명을 타고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서울 곳곳을 경유하며 열리던 서울사진축제가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으로 ‘돌아왔다’ 는 선언 같은 사실은 흥미롭다. 2010년 시작한 서울사진축제는 2021년까지 매해 서울의 여러 공간에서 이어져 오다가 지난해 개관한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에서 5년 만에 다시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서울사진 시립미술관은 사진의 집을 자처하고 ‘컴백홈’을 2026년 서울사진축제의 주제로 내 걸었다. 떠돌던 사진들이 사진을 중심 매체로 다루는 미술관 안으로 들어오며 자신의 ‘집’을 갖게 된 셈이다. 이에 이러한 맥락 위에서 전시는 네 개의 섹션을 통해 집을 하나의 고정된 공간이 아닌 이동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장소로 제시한다. 오랫동안 부재했던 공공 사진미술관의 개관 후 열린 이번 축제는 한국 사진계에 있어 하나의 상징적인 장면이자 귀환의 장처럼 다가 온다.

그러나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돌아온다는 인식이 단순하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된다. 전시장 곳곳 에는 정착하지 못한 몸들, 사라지는 장소들, 임시적인 삶의 흔적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와 함께 서울시립사진미술관이라는 제도적 존재감 역시 강하게 드러난다. 떠돌며 흔들리는 작업들이 안정된 공간 안에 배치될 때의 격차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전시를 보며 몇 가지 질문들이 남았다. 새로운 ‘집’ 안에 모여 분류된 사진들은 여전히 미결로 남아 떠도는 집들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을까. 혹은 ‘집’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 많은 감각과 서사를 포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물음을 따라 특정한 작업 앞에서 느꼈던 균열과 작업들 사이에서 발생했던 관계들에 조금 더 집중해보고자 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작업과 그렇지 않은 작업의 차이는 선호나 우열에 있지 않다. 다만 서로 다른 작업들이 연결되거나 어긋나는 순간들을 따라가며, 연결의 즐거움과 끝내 남겨졌던 껄끄러움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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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섹션인 ‘집을 이루는 것’은 비교적 어두운 조도의 공간에서 시작된다. 오석근, 박형렬, 정경자, 한영수의 작업은 각기 다른 시대와 풍경을 경유하며 배제해둔 풍경과 집을 집으로 만들어온 요소들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호출한다. 오래 시선이 머문 작업은 한영수의 〈서울〉 연작이었다. 전후 서울의 거리와 골목을 담은 사진에서 집은 실내가 아니라 사람과 움직임이 교차하는 도시의 풍경에 가깝다. 꽃을 머리에 이고 지나가는 여성들, 골목을 뛰노는 아이들의 장면은 생활의 리듬 자체를 집으로 확장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직전에 마주했던 정경자의 작업과 이어지면서도 대비되고 있다. 두 작업 모두 객관적인 공간보다도 개인에 의해 정지가 일어난 장소1로서의 집을 다룬다. 정경자는 부재와 기억을 따라가며 집을 내면화된 장소로 끌어들인다. 한영수는 거리에 나가 집의 반경을 도시의 광경까지 열어낸다. 정경자가 익숙한 집 그리고 머무름과 이동이 교차하는 호텔을 가깝고 낯설게포착한다면, 한영수의 서울 사진들은 거리 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짓과 생활의 리듬을 새로운 순간으로 재구성한다. 그렇게 두 작업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집을 이루는 것 사이의 긴장을 만든다.


1 지리학자 이푸 투안에 따르면 처음에 별 특징이 없던 공간은 우리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가치를 부여하며 애착이 녹아들 때 장소가 된다. (공간과 장소, 이-푸 투안, 사이, 2020.10.)



1 지리학자 이푸 투안에 따르면 처음에 별 특징이 없던 공간은 우리가 그곳을 더 잘 알게 되고 가치를 부여하며 애착이 녹아들 때 장소가 된다. (공간과 장소, 이-푸 투안, 사이, 2020.10.)


다만 설치 방식에 있어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한영수의 사진들은 비교적 낮은 위치에 유리액자 안에 놓인 채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이미지를 들여다보는 순간 관람자의 그림자가 화면에 내려앉았다. 생활의 밀도와 거리의 호흡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작업이었던 만큼, 관람자의 몸이 이미지를 가로막는 것은 흐름을 방해하는 경험에 가까웠다.

두 번째 섹션인 '이동하는 집'은 물리적인 거처로서의 집에서 벗어나 돌아가지 못했거나 뒤늦게 소환된 돈재들을 다룬다. 특히 이 섹션의 작업들은 '정착되지 못한 상태'를 사진의 형식 자체 안에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은 단일한 기록으로 고정하지 않고 영상과 사물을 활용하거나 기울어진 면에 설치하는 등의 방식으로 계속 이동하며 보는 이들을 흔단다. 전시가 '집'을 말하면서도 안정된 귀환의 감각에 쉽게 도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이러한 흔들림에 있을 것이다.

함혜경의 <회색 양복의 사나이>는 월북 이후 역사 속에서 배제되었던 화가 임군홍이 찍힌 사진한 장에서 출발한다. 함혜경은 단일한 사진 이미지를 단순한 기록물로 소비하지 않고, 그것을 다시 영상이라는 시간 기반의 매체로 확장한다. 사진 한 장이 품은 침묵과 공백은 작가가 그 지역을 따라 여행하고 기록과 음성을 덧입혀 영상으로 다듬는 과정에서 질기고 연하게 떠오른다. 전시 전체가 ‘집’의 개념을 확장하려 했다면, 함혜경의 작업은 사진 자체의 전시 방식을 확장한다. 한 장의 이미지로 남겨진 인물을 영상의 시간으로 번역함으로써 사진은 단순한 과거의 증거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이동의 상태를 드러낸다. 이렇게 <회색 양복의 사나이>는 하나의 장면에 고정되지 않고 빛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영되는 또다른 사진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든다.

한편, 신희수의 <막일: 노가다>와 <블루존>은 머물 수 없음과 머물지 않음 사이를 오가며 집이 정착의 장소가 될 수 없을 때 우리는 각자의 몸을 임시 거처이자 집으로 삼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사진은 단순히 현장을 기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관람자의 몸까지 기울게 만들며 불안정한 상태를 체험하게 한다. 기울어진 벽면을 따라 울룩불룩하게 놓인 노동자와 그를 둘러싼일상의 사진들은 건설 현장의 불안정성에 닿으며 끝내 돌아가지 못한 이들의 삶을 직관적으로전달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불안정성은 미술관이라는 안정된 공간 안에서 다시 하나의 전시경험으로 조직되며 충돌하는 감각을 안고 있다. 떠돌며 미끄러지는 감각들이 제도적 공간 안에안전하게 배치되는 순간 발생하는 어긋남 역시 주목해 볼 수 있다.

세 네번째 섹션은 비교적 최근 활동하고 있는 신진 작가들의 작업들로 구성된다. 세 번째 섹션 ‘길 위에서’는 발 딛고 있는 곳을 집으로 임시 저장하는 상태들을 보여준다. 김민의 〈플라워 크래커〉와 〈시멘트 컵케이크〉는 집이 아닌 곳에 머무는 시간을 다룬다. 작가가 대체복무를 수행하며 제도 속 공간에 묶여 있는 동안 그의 연인은 투병이라는 고립된 시간을 통과한다. 남는 것은 두 사람이 함께 또 따로 임시적인 집을 통과한 흔적이자 사진들이다. 이한구의 〈군용〉 역시 이러한 흐름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작가는 군대라는 폐쇄된 공간을 단순한 조직의 기록이 아니라, 오랜 시간 머물며 사적인 기억이 축적되는 임시 거처로 이해한다. 한국의 군인들에게 군대는 분명 집이 아닌 곳이지만, 가장 오래 머무르는 생활 공간이기에 일시적인 집이 된다. 특히 살의 접촉과 박제된 나비 그리고 빛 속의 일기 등을 담은 이미지들은 임시적인 거처에서도 개인의 생활 리듬이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흐름은 나나와 펠릭스의 〈카메라, 담배, 위스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보다 복합적으로 이어진다. 작가가 직접 촬영한 도시의 스냅사진들과 길 위에서 주운 액자 이미지들이 뒤섞인 설치 작업은 집과 도시, 기억과 폐기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길 위의 리듬이 전시장 안으로 들어오며 450 점의 액자 더미는 집처럼 복잡한 동시에 무덤처럼 썰렁한 공기를 만든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아버지의 죽음은 집을 이루는 일부의 부재로 남고, 작가는 도시를 거대한 집처럼 떠돌며 사진을 찍고 버려진 이미지들을 모았다. 졸업사진, 가족사진, 광고사진처럼 누군가의 기억이 담긴 채 버려진 액자들 사이로 새롭게 찍힌 밤의 풍경들이 끼워져 있다. 그것들이 전시장 바닥에 무더기로 쌓인 광경은 속하지 못한 존재들이 모이는 슬픔과 환희를 상기시킨다.

세 번째 섹션을 보며 두 번째 섹션 ‘이동하는 집’과 세 번째 섹션 ‘길 위에서’의 구분 기준이 다소 모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동하는 집’이 거대한 역사와 제도에 휩쓸려 돌아오지 못한 존재들을 불러낸다면 ‘길 위에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불안정한 삶의 상태와 그 시간을 견디는 몸의 경험에 더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머물고 떠돌며 정착하지 못하는 감각이 겹쳐 있었기에 이 둘의 층위를 세밀하게 조율했다면, 익숙한 집의 개념이 흩어지고 확장되는 방식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 ‘길 위에서’ 와 ‘우리의 집’ 전시실 사이 복도와 계단에는 김준의 <사라진 소리>와 <공생>이 전시되어 있다. 김준은 재개발과 재생의 흐름 속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변형되는 도시의 장소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자연환경 속의 미세한 소리들을 수집하여 이미지와 함께 다시 들려준다. 소리와 이미지가 함께 놓여 있기에 관람객은 사운드 박스를 직접 열고 닫으며 보기와 듣기를 넘어 하나의 환경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사진과 소리를 동시에 감상하는 것이 영상을 시청하는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묻게 된다. 다감각적 경험을 통해 집의 범위를 환경과 생태 전체로 확장된다. 김준의 작업은 전시 사이 공간에서 잠시의 환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세 번째 섹션을 보며 두 번째 섹션 ‘이동하는 집’과 세 번째 섹션 ‘길 위에서’의 구분 기준이 다소 모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동하는 집’이 거대한 역사와 제도에 휩쓸려 돌아오지 못한 존재들을 불러낸다면 ‘길 위에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불안정한 삶의 상태와 그 시간을 견디는 몸의 경험에 더 몰두하고 있다. 그러나 머물고 떠돌며 정착하지 못하는 감각이 겹쳐 있었기에 이 둘의 층위를 세밀하게 조율했다면, 익숙한 집의 개념이 흩어지고 확장되는 방식이 더욱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 ‘길 위에서’ 와 ‘우리의 집’ 전시실 사이 복도와 계단에는 김준의 <사라진 소리>와 <공생>이 전시되어 있다. 김준은 재개발과 재생의 흐름 속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변형되는 도시의 장소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자연환경 속의 미세한 소리들을 수집하여 이미지와 함께 다시 들려준다. 소리와 이미지가 함께 놓여 있기에 관람객은 사운드 박스를 직접 열고 닫으며 보기와 듣기를 넘어 하나의 환경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사진과 소리를 동시에 감상하는 것이 영상을 시청하는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묻게 된다. 다감각적 경험을 통해 집의 범위를 환경과 생태 전체로 확장된다. 김준의 작업은 전시 사이 공간에서 잠시의 환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마지막 섹션인 ‘우리의 집’은 집의 범위를 공동체적 관계로 다룬다. 이예은의 <실내온도 높이기>는 불가능하거나 어색해 보이는 장면들을 몸으로 실험한다. 차가운 건물 외벽을 껴안는 사진을 실제 벽 모서리에 설치하고, 공중에 멈춘 달걀이나 논밭에 묻히듯 엎드린 장면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비현실적이면서도 묘하게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신수와의 작업 〈Be누(累)〉는 낯선 사람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샤워를 해도 될까요?”라고 묻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는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닌 거절당할 가능성을 스스로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시도다. 실제로 냉담한 반응을 수차례 마주하지만 작가는 그런 상황을 피하지 않고 반복해서 자신의 몸을 던진다. 관계 맺기의 실패 가능성 자체를 작업의 중심으로 가져와 집의 경계를 실험하는 것이다.

이예은과 신수와의 작업은 모두 작가가 불가능 앞에서 직접 몸을 움직인 결과이다. 이예은이 자신의 몸으로 장면 자체의 가능성을 만든다면 신수와는 타인과의 관계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그렇게 오늘날 우리의 집은 더 이상 안정된 공간이 아니라, 잠시 생성되는 상태이자 분절을 실험하는 갈망의 공간이 된다. 그렇게 마지막 섹션에서 집은 더 이상 보호받는 내부가 아니라, 타인에게 끊임없이 접근하고 거절당하며 다시 관계를 시도하는 과정 자체에 가까워진다. 다만 전시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귀결되는 순간, 앞선 섹션들이 공유하던 미결의 감각이 공동체의 언어 안으로 급하게 봉합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2026년 서울사진축제는 사진을 매개로 하는 공공의 행사임을 고려하여 미술관 내부에만 머물지 않고 보고, 읽고, 대화하고, 만들고, 공유하는 참여형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또한 서울 곳곳의 사진 관련 장소들과 연결되는 ‘서울 사진 산책’을 통해 축제의 경험을 도시의 거리와 일상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미술관 곳곳에 동아시아 사진책 100권을 비치한 〈무빙 라이브러리〉와 시민들의사진을 모아 완성하는 〈집-들이!(Zip-In!)〉 프로젝트는 사진집과 집을 연결하고 각자의 기억을도시 안에 겹쳐놓는 행사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번 축제는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열린 첫 사진축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공공기관 안에서 사진 작업을 지속적으로 아카이빙할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사진계에 있어 반갑고도 필요한 움직임이다.

그러나 전시를 모두 본 뒤에 남는 것은 신선한 방식의 축제보다는 기존에 접해오던 미술관 전시의 형식이었다. 물론 이는 새롭게 개관한 사진미술관이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 가는 과정으로도 읽힌다. 다만 전시가 집을 이동과 기억, 관계와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동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을 떠올리면, ‘집으로 돌아온 사진 축제’라는 표현에는 찝찝함이 남는다. 사진들이 마침내 자신 만의 안정된 장소에 안착했다는 서사는 앞선 섹션들이 보여주었던 불안정성과 이동의 감각을 다시 하나의 의미 아래 정리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슷한 아쉬움은 섹션의 구성과 마무리에서도 드러난다. 세 번째 섹션까지 집에 대한 서로 다른감각과 상태들이 병치되었다면, 마지막 섹션에서는 그것들이 ‘우리의 집’이라는 이름 아래 수렴하며 연대와 희망, 공동체와 같은 가치들로 정리되고 있다. 그러한 가치들은 집을 말하는 데 필요한요소일 수 있다. 하지만 의미가 지나치게 명시되는 순간, 관람자가 스스로 집의 의미를 더듬어볼여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진을 중심 매체로 삼은 전시였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사진을 담은 가장 직접적인 형식이자 집인 사진책을 전시하는 굵직한 섹션이 추가로 마련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또한 남는다.

그럼에도 이번 서울사진축제는 집이라는 개념을 하나의 단정적인 정의로 귀결시키기보다, 서로다른 감각과 관계들이 교차하는 장으로 선보였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미를 가진다. 어쩌면 이번사진축제가 끝내 도달하지 못한 지점은 개개인의 집 이야기를 섹션의 구분 없이 마주할 때야 가능할지도 모른다. 모든 처음에 있어 중요한 것은 하나의 단단한 답에 도착하는 일이 아니라, 그사이를 각자의 몸으로 통과하는 일일 것이다. 어찌 되었건 이 글은 사진의 새로운 보금자리인 서울시립 사진미술관과 서울사진축제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고자 작성되었다. 각자의 집과 세월이 담긴 사진들, 그리고 삶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들이 다시 교차할 때, ‘사진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는 선언이 싱싱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2026년 서울사진축제는 사진을 매개로 하는 공공의 행사임을 고려하여 미술관 내부에만 머물지 않고 보고, 읽고, 대화하고, 만들고, 공유하는 참여형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또한 서울 곳곳의 사진 관련 장소들과 연결되는 ‘서울 사진 산책’을 통해 축제의 경험을 도시의 거리와 일상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미술관 곳곳에 동아시아 사진책 100권을 비치한 〈무빙 라이브러리〉와 시민들의사진을 모아 완성하는 〈집-들이!(Zip-In!)〉 프로젝트는 사진집과 집을 연결하고 각자의 기억을도시 안에 겹쳐놓는 행사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번 축제는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열린 첫 사진축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공공기관 안에서 사진 작업을 지속적으로 아카이빙할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사진계에 있어 반갑고도 필요한 움직임이다.

그러나 전시를 모두 본 뒤에 남는 것은 신선한 방식의 축제보다는 기존에 접해오던 미술관 전시의 형식이었다. 물론 이는 새롭게 개관한 사진미술관이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 가는 과정으로도 읽힌다. 다만 전시가 집을 이동과 기억, 관계와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동하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을 떠올리면, ‘집으로 돌아온 사진 축제’라는 표현에는 찝찝함이 남는다. 사진들이 마침내 자신 만의 안정된 장소에 안착했다는 서사는 앞선 섹션들이 보여주었던 불안정성과 이동의 감각을 다시 하나의 의미 아래 정리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슷한 아쉬움은 섹션의 구성과 마무리에서도 드러난다. 세 번째 섹션까지 집에 대한 서로 다른감각과 상태들이 병치되었다면, 마지막 섹션에서는 그것들이 ‘우리의 집’이라는 이름 아래 수렴하며 연대와 희망, 공동체와 같은 가치들로 정리되고 있다. 그러한 가치들은 집을 말하는 데 필요한요소일 수 있다. 하지만 의미가 지나치게 명시되는 순간, 관람자가 스스로 집의 의미를 더듬어볼여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진을 중심 매체로 삼은 전시였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사진을 담은 가장 직접적인 형식이자 집인 사진책을 전시하는 굵직한 섹션이 추가로 마련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또한 남는다.

그럼에도 이번 서울사진축제는 집이라는 개념을 하나의 단정적인 정의로 귀결시키기보다, 서로다른 감각과 관계들이 교차하는 장으로 선보였다는 점에서 충분한 의미를 가진다. 어쩌면 이번사진축제가 끝내 도달하지 못한 지점은 개개인의 집 이야기를 섹션의 구분 없이 마주할 때야 가능할지도 모른다. 모든 처음에 있어 중요한 것은 하나의 단단한 답에 도착하는 일이 아니라, 그사이를 각자의 몸으로 통과하는 일일 것이다. 어찌 되었건 이 글은 사진의 새로운 보금자리인 서울시립 사진미술관과 서울사진축제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고자 작성되었다. 각자의 집과 세월이 담긴 사진들, 그리고 삶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들이 다시 교차할 때, ‘사진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는 선언이 싱싱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EDITOR: KIM HYO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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