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설치 방식에 있어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한영수의 사진들은 비교적 낮은 위치에 유리액자 안에 놓인 채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이미지를 들여다보는 순간 관람자의 그림자가 화면에 내려앉았다. 생활의 밀도와 거리의 호흡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작업이었던 만큼, 관람자의 몸이 이미지를 가로막는 것은 흐름을 방해하는 경험에 가까웠다.

두 번째 섹션인 '이동하는 집'은 물리적인 거처로서의 집에서 벗어나 돌아가지 못했거나 뒤늦게 소환된 돈재들을 다룬다. 특히 이 섹션의 작업들은 '정착되지 못한 상태'를 사진의 형식 자체 안에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은 단일한 기록으로 고정하지 않고 영상과 사물을 활용하거나 기울어진 면에 설치하는 등의 방식으로 계속 이동하며 보는 이들을 흔단다. 전시가 '집'을 말하면서도 안정된 귀환의 감각에 쉽게 도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이러한 흔들림에 있을 것이다.
함혜경의 <회색 양복의 사나이>는 월북 이후 역사 속에서 배제되었던 화가 임군홍이 찍힌 사진한 장에서 출발한다. 함혜경은 단일한 사진 이미지를 단순한 기록물로 소비하지 않고, 그것을 다시 영상이라는 시간 기반의 매체로 확장한다. 사진 한 장이 품은 침묵과 공백은 작가가 그 지역을 따라 여행하고 기록과 음성을 덧입혀 영상으로 다듬는 과정에서 질기고 연하게 떠오른다. 전시 전체가 ‘집’의 개념을 확장하려 했다면, 함혜경의 작업은 사진 자체의 전시 방식을 확장한다. 한 장의 이미지로 남겨진 인물을 영상의 시간으로 번역함으로써 사진은 단순한 과거의 증거가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이동의 상태를 드러낸다. 이렇게 <회색 양복의 사나이>는 하나의 장면에 고정되지 않고 빛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영되는 또다른 사진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든다.

한편, 신희수의 <막일: 노가다>와 <블루존>은 머물 수 없음과 머물지 않음 사이를 오가며 집이 정착의 장소가 될 수 없을 때 우리는 각자의 몸을 임시 거처이자 집으로 삼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사진은 단순히 현장을 기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관람자의 몸까지 기울게 만들며 불안정한 상태를 체험하게 한다. 기울어진 벽면을 따라 울룩불룩하게 놓인 노동자와 그를 둘러싼일상의 사진들은 건설 현장의 불안정성에 닿으며 끝내 돌아가지 못한 이들의 삶을 직관적으로전달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불안정성은 미술관이라는 안정된 공간 안에서 다시 하나의 전시경험으로 조직되며 충돌하는 감각을 안고 있다. 떠돌며 미끄러지는 감각들이 제도적 공간 안에안전하게 배치되는 순간 발생하는 어긋남 역시 주목해 볼 수 있다.

세 네번째 섹션은 비교적 최근 활동하고 있는 신진 작가들의 작업들로 구성된다. 세 번째 섹션 ‘길 위에서’는 발 딛고 있는 곳을 집으로 임시 저장하는 상태들을 보여준다. 김민의 〈플라워 크래커〉와 〈시멘트 컵케이크〉는 집이 아닌 곳에 머무는 시간을 다룬다. 작가가 대체복무를 수행하며 제도 속 공간에 묶여 있는 동안 그의 연인은 투병이라는 고립된 시간을 통과한다. 남는 것은 두 사람이 함께 또 따로 임시적인 집을 통과한 흔적이자 사진들이다. 이한구의 〈군용〉 역시 이러한 흐름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작가는 군대라는 폐쇄된 공간을 단순한 조직의 기록이 아니라, 오랜 시간 머물며 사적인 기억이 축적되는 임시 거처로 이해한다. 한국의 군인들에게 군대는 분명 집이 아닌 곳이지만, 가장 오래 머무르는 생활 공간이기에 일시적인 집이 된다. 특히 살의 접촉과 박제된 나비 그리고 빛 속의 일기 등을 담은 이미지들은 임시적인 거처에서도 개인의 생활 리듬이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흐름은 나나와 펠릭스의 〈카메라, 담배, 위스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보다 복합적으로 이어진다. 작가가 직접 촬영한 도시의 스냅사진들과 길 위에서 주운 액자 이미지들이 뒤섞인 설치 작업은 집과 도시, 기억과 폐기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길 위의 리듬이 전시장 안으로 들어오며 450 점의 액자 더미는 집처럼 복잡한 동시에 무덤처럼 썰렁한 공기를 만든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아버지의 죽음은 집을 이루는 일부의 부재로 남고, 작가는 도시를 거대한 집처럼 떠돌며 사진을 찍고 버려진 이미지들을 모았다. 졸업사진, 가족사진, 광고사진처럼 누군가의 기억이 담긴 채 버려진 액자들 사이로 새롭게 찍힌 밤의 풍경들이 끼워져 있다. 그것들이 전시장 바닥에 무더기로 쌓인 광경은 속하지 못한 존재들이 모이는 슬픔과 환희를 상기시킨다.


마지막 섹션인 ‘우리의 집’은 집의 범위를 공동체적 관계로 다룬다. 이예은의 <실내온도 높이기>는 불가능하거나 어색해 보이는 장면들을 몸으로 실험한다. 차가운 건물 외벽을 껴안는 사진을 실제 벽 모서리에 설치하고, 공중에 멈춘 달걀이나 논밭에 묻히듯 엎드린 장면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비현실적이면서도 묘하게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다. 신수와의 작업 〈Be누(累)〉는 낯선 사람의 집 초인종을 누르고 “샤워를 해도 될까요?”라고 묻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는 단순한 퍼포먼스가 아닌 거절당할 가능성을 스스로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시도다. 실제로 냉담한 반응을 수차례 마주하지만 작가는 그런 상황을 피하지 않고 반복해서 자신의 몸을 던진다. 관계 맺기의 실패 가능성 자체를 작업의 중심으로 가져와 집의 경계를 실험하는 것이다.
이예은과 신수와의 작업은 모두 작가가 불가능 앞에서 직접 몸을 움직인 결과이다. 이예은이 자신의 몸으로 장면 자체의 가능성을 만든다면 신수와는 타인과의 관계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그렇게 오늘날 우리의 집은 더 이상 안정된 공간이 아니라, 잠시 생성되는 상태이자 분절을 실험하는 갈망의 공간이 된다. 그렇게 마지막 섹션에서 집은 더 이상 보호받는 내부가 아니라, 타인에게 끊임없이 접근하고 거절당하며 다시 관계를 시도하는 과정 자체에 가까워진다. 다만 전시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귀결되는 순간, 앞선 섹션들이 공유하던 미결의 감각이 공동체의 언어 안으로 급하게 봉합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